전두환 신군부의 국민통제 전략 - 3S정책의 서막
*3S정책 : 3S정책은 섹스(SEX), 스포츠(SPORTS), 스크린(SCREEN)의 머릿글자를 딴 것으로 독재정권이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곳으로 돌리기 위해 즐겨 쓴다는 정책입니다. 즉, 우민화를 유도하여 대중의 정치적 자기 소외, 정치적 무관심으로 지배자가 마음대로 대중을 조작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말합니다.
1. 배경과 출발
한국프로야구의 출발은 추후 알려진대로 70~80년 신군부 독재정권의 3S정책의 일환으로, 대기업들의 거부할 수 없는 수용으로 태동되어지게 됩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전국적으로 휘몰아친 고교야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편승해 1970년대 중반 야구계의 프로화 논의가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1975년 재미교포 사업가인 홍윤희씨가 방한하여 야구협회 관계자, 감독들을 규합하여 프로야구 창설에 관한 긍정적인 반응들을 모아내며 본격적인 사업계획에 착수하였으나 당시 대한야구협회 김종락 회장을 제외한 다른 이사진들의 시기상조론에 밀려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19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국민정서와 여가선용을 위한 3S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스포츠 창설지시가 떨어졌고, 비서관은 야구협회와 축구협회에 프로화 검토를 의뢰하게 됩니다. 이때 축구협회에서는 운동장 야간조명 설치 등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고 한 반면, 야구협회 전무를 지낸 이용일과 운영부장 출신 이호헌이 가세하여 수립한 야구 프로화 계획서는 정부의 지원금 한푼 없이도 프로화가 가능하다는 골자의 내용이 주목받으며 우선 프로야구부터 출범시키기로 낙착을 보기에 이릅니다.
정부 보조가 없는 방법이라는 것은 바로 대기업 들이 야구단을 하나씩 맡도록 한 것입니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대통령의 특별지시를 따르지 않는 기업은 거의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정착을 위해 야구단을 만든 기업들에게 운영 면에서 여러 혜택(특히 기업 세무 면에서)을 주기는 했습니다.)
최초 계획안은 이러했습니다.
위의 계획은 이호헌, 이용일의 첫번째 계획안이었으나 실제로 청와대로 올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는 이 계획안이 올라가는데 결론은 그룹오너의 고향지역이거나 그룹이 위치한 곳, 또는 처음 시작한 곳 같은 각 그룹에 있어 중요한 지역을 맡긴다는 내부원칙을 세워 계획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룹오너들의 애향심을 이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MBC와 삼성그룹, 롯데그룹을 제외하고는 연고권 문제와 프로야구라는 생소한 사업에 진출한다는 불안감과 부담감으로 고사하며 프로야구 출범은 난항을 겪게 됩니다. 결국 당시 신군부세력을 포함한 정치권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총동원하여 협상을 다시 가시화시키고 그에 따라 광주에는 해태가, 충청도에는 OB가 선수부족의 이유로 3년후 서울연고 이전을 약속받고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립총회 거의 직전 삼미가 인천직할시 연고기업으로 프로야구 참여를 확정짓게 됩니다.
2. 야심과 속사정
MBC는 청와대의 프로야구 출범계획과 별도로 창사 20주년 기념사업으로 할렐루야 축구단을 모델로 한 단일 프로야구단 창단을 계획중이었고, 삼성은 당시 경북고, 대구상고등을 중심으로 하는 대구경북권 고교야구의 우세에 따라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으며, 롯데는 이미 1975년부터 실업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모기업 일본롯데도 프로야구팀을 보유하고 있던데다 당대 최고의 에이스 최동원의 보유권마저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세 기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프로야구에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롯데는 신격호 회장이 무조건 참여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어서 일선에서 제기한 포기론을 강력하게 떨쳐버릴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이 당시 신격호 회장의 결단이 없었다면, 부산경남 연고는 럭키금성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후에 한가지 사실이 알려졌는데, 당시 별도로 프로야구단 창단을 기획중이던 MBC가 이진희 사장의 지시아래 MBC TF팀을 구성하고 4팀이 참여하는 리그를 구상하게 되는데 이는 청와대의 전두환에게 보고가 되고 전두환은 깜짝 놀라며 축구가 아니었냐고 되묻게 됩니다. 전두환은 과거 육사시절 골키퍼출신일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는데 축구때문에 인연이 된 사람들도 제법 많다고 알려졌습니다. 결국 프로야구의 출범은 전두환의 지시와 의지보다는 MBC이진희 사장의 기획과 연출이 만들어낸 작품으로 보여집니다.
다만 정부가 개입을 하긴 하는데 이건 주도라기 보다는 마지막 지역연고 조정과정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OB였는데 대전충청과는 연고가 없었고 지역선수층이 그리 두껍지 않아 OB는 서울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현대가 인천경기강원권을 포기하고 삼미가 들어가게 되자 이번에는 인천경기강원권을 요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두산창업주 박승직이 경기도 광주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하게 되지만 결국 이 두가지 요청은 구단주회의에서 모두 거부되게 됩니다.
이렇게 OB가 서울연고를 주장하고 나서자 롯데도 같이 서울연고를 주장하게 되는데, 롯데는 일본의 롯데처럼 수도권이 아니면 흥행이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합니다. 또한 해태가 참여하게 된것도 문제였는데 원래 같은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는 들어오지 않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는데 해태가 들어오게 되면서 제과업계 라이벌구도가 형성되게 된 점도 작용하게 됩니다.
결국 중재안이 나오게 됬는데, 이 중재안이라는 것이 럭키금성 부산연고를 통한 롯데의 압박이었습니다. 처음 프로야구창단 제의를 들은 럭키금성그룹은 그룹 구자경회장의 외유에 따른 결정을 고위층에서 하지 못하게 되고 이 틈을 타 롯데가 부산연고를 얻게 되었는데 추후 다시 LG그룹 구자경회장의 때늦은 참여결정을 알고있던터라 그 이유를 빌미로 롯데를 압박하게 되고 롯데는 결국 조용히 꼬리를 내리고 맙니다. (LG그룹 구자경회장은 이때 참여하지 못한것을 무척 아쉬워했으나 마음대로 참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추후에 MBC를 인수하는 것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게 됩니다.)
MBC도 서울을 나눌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었는데, 결국 청와대의 프로야구창단을 없던일로 할수도 있다는 협박하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약간의 실리는 챙겼는데, 협상과정에서 선수배분을 1:1에서 2:1로 바꿨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로 원년드래프트에서 MBC는 김재박과 이해창을, OB는 박철순을 각각 지명하게 됩니다.
삼미의 참여는 결과적으로 기적이라고 묘사되지만, 어쩌면 결과론일지도 모릅니다. 현대가 경기 연고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게 된 두산이 경기 연고를 요구했다는 것은 위에 나오는데, 이걸 막은 것은 이용헌등이 KBO에 충청권에 참여할 기업이 마땅치 않아서 두산에게 충청권을 맡기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2안에서는 충청권 연고의 기업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한국화약입니다. 실제로 한국화약도 오너 일가가 야구 팬들이었기 때문에 만일 제의했으면 받았을 것이란 것이 현재의 중론입니다.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빙그레는 원년기업일 수도 있었고, 두산이 인천연고 구단으로 출발했다면 인천연고구단의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재밌는 사실은, 금호가 호남지역에서 창단하기로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호그룹은 호남색을 지우고 싶어하는 데다가 스포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명목상으로는 오너인 아버지가 아들들이 자기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나가리'시켰는데 이 때 해태 박건배 회장이 프로야구 준비위에 전화를 해서 "호남지역 창단을 우리가 하면 안 되느냐"고 해서 결국 해태가 참가하게 되어 전설의 팀이 된 것입니다. 만일 해태의 참여가 없었더라면, 금호그룹은 회장이 청와대에 끌려가서 억지로 구단을 떠맡거나 정권에 비협조적 이었다는 이유로 국제그룹 꼴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요컨대 알려진 것처럼 해태 회장을 청와대에 불러 협박한 것이 아니라, 박건배 회장이 야구를 좋아해 야구팀이 생긴 셈입니다.
사실 삼미 슈퍼스타즈, 쌍방울 레이더스, NC 다이노스처럼 한국프로야구 팀의 확장은 야빠 사업가들의 공이 컸습니다.
다만 이 부분에는 이견이 있는데 해태의 초대 감독이자 당시 유명 야구인인 김동엽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김동엽이 MBC의 프로야구창설계획 극초창기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광주지역을 맡을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본인의 연줄을 이용 해태를 청와대에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청와대에서는 김동엽과 박건배회장을 부르는데 이 자리에서 정부는 프로야구 참여를 권유하게 됩니다. 이때 박건배 회장이 정부 인사 앞에서 김동엽을 감독으로 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참여를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 김동엽 자서전 내용중
본인이 청와대에 연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김동엽을 감독으로 하게 해달라는 부분은 83프로야구 연감에도 나오는 사실이긴 합니다.
3. 결과론
당시 정부가 초창기 프로야구를 3S정책에 이용하려 했던것은 맞지만 시기적으로 81년 대한민국 세계청소년야구의 우승으로 인한 대중들의 관심과 야구에 대기업들의 숨겨진 야심이 잘 맞아떨어져 가능한 상황이었고, 한 기획자의 아이디어로 인한 지역연고가 예기치 않게 지역감정의 화살로 돌아와 추후 신군부정권을 비판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든 지역감정의 골이 깊어진 대한민국 사회의 현상황에서 프로야구가 한몫을 했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출범이 다양한 서막을 마감하고 눈앞에 다가오게 됩니다.